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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의 길을 닦은 신의 한수, 참근교대제!지구촌 과거/이웃을 알자 - 일본 2020. 3. 13. 12:17
전쟁을 겪은 동아시아 3국은 근대화로 가는 길에 있어서 가장 빨리 성공한 일본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나를 위협하는 것은 항상 가까이 있는 센 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이 그랬고 일본이 그랬습니다.
알아야 대비하고 알아야 이깁니다.
원폭의 참사를 겪고도 세계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을 알아봅니다.
도쿠가와 막부와 번
임진왜란의 대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힘겨워하고 명나라는 여진족(후일 청나라)의 위협을 받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에 죽고 나자, 새로이 권력을 쥔 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는 1603년 자신의 본거지인 에도(현재의 도쿄)에 막부를 열고 쇼군(정식명칭은 세이이타이쇼군)의 칭호를 조정으로부터 받습니다. 250여 년에 걸친 에도막부의 서막이 열린 것입니다.
도쿠가와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270여 개의 지방마다 영주가 있었습니다. 이 지방의 영주를 ‘다이묘(또는 번주)’라고 하고, 그들이 다스리는 봉토를 ‘번’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번으로는 신번, 후다이번, 도자마번이 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의 근대사를 이해하는데 자주 등장하므로 기억해두면 좋습니다.
신번은 도쿠가와의 친척에 해당하는 가문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다만 이들은 막부에서 직책을 맡거나 정치에 간여하는 것은 금지되었지요. 종가인 막부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종실이 늘 견제의 대상이 되어 숨죽여 지내던 것과 같습니다.
후다이번은 대대로 도쿠가와 집안에 충성을 다해 온 가문들이 다스리던 번을 말합니다. 막정의 요직을 이들이 대부분 차지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도자마번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대항해서 도요토미 편에 가담하여 싸웠던 가문들이 다스리던 번입니다. 이들은 도쿠가와에게 복종하기는 했으나 늘 감시의 대상이었습니다. 결국 후일에 이들의 대표 격인 사쓰마번과 조슈번에 의해 도쿠가와 막부시대는 끝이 나고 맙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이런 번들을 통제하기 교묘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합니다. 그 중의 백미는 ‘참근교대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근교대제
다이묘들는 정기적으로 자기의 번을 떠나서 1년간 에도에 강제적으로 머물러야 했습니다. ‘참근’이란 에도에 상경하여 머무는 것이고 ‘교대’는 자신의 영지로 복귀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이묘의 정처와 적자는 에도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다이묘만 에도와 자신의 영지를 왔다갔다 할 수 있었습니다. 감시와 통제를 위한 일종의 인질제도이었습니다. 그럼, 이러한 인질제도가 어떻게 일본 근대화를 이루는데 기여를 했다는 것일까요? 원근각지에서 1년마다 수백, 수천리를 이동하는 것은 대단히 큰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도에 다이묘의 가족들이 거처할 번저를 유지하는 것도 경제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경비를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동 중간의 도로 사정이 열악하면 개보수까지 해가면서 멀리 사는 다이묘는 수십 일이 걸리는 행차를 해야 했습니다. 실제 이동 시 들었던 비용을 계산해보면 현재의 화폐가치로 환산했을 때 평균 3-4억 엔이 편도 여행비용으로 들었다니 참으로 대단한 행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이묘들간의 자존심 경쟁까지 보태져서 서로 돋보이려고 애를 썼고, 여행 중에 머무는 곳에서의 주민들의 칭송이나 미담에까지 신경을 썼다고 하니 이래저래 돈이 많이 드는 매우 화려한 행차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차가 전국의 270여 곳에서 일어났으니 길에 뿌려진 돈이 얼마나 컸을지는 두말하면 잔소리겠지요. 이렇게 뿌려진 돈은 장거리 이동에 따른 교통, 숙박, 물자 수요 등 주변 산업을 성장시켰다. 장거리 이동과 원거리 유통의 발전은 화폐경제를 발전시켜 각종 상업경제 활동은 더욱 활성화 되었습니다. 경제 발전의 기본인 인프라의 구축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입니다.
중앙과 지방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 한 도시에 거주하게 됨으로써 에도는 눈부신 발전을 합니다. 수십 만 명에 달하는 다이묘와 수행원들이 ‘순수한 소비자’로 유입됨으로써 에도는 거대한 소비시장을 형성하게 됩니다. (1721년, 도쿠가와 막부가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일본의 전국인구는 이때 이미 3,000만 명을 넘어섰고 에도의 인구는 100만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다이묘가 머물 저택과 수행원 숙소, 공공 인프라를 위한 토목 건설 건축업이 발달하고, 교제를 위한 외식, 공예, 운수, 패션이 그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교제에 있어서 필수적인 차를 마시는 문화와 도기의 발달은 후일 유럽에서 대히트를 하게 되는 일본 도자기 문화의 근간이 됩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우리나라 도공 이삼평의 공이 지대합니다. 일본인들은 대은인 이삼평의 고마움을 잊지말자는 비석을 세우고 ‘우리가 가진 제철소도 대포도 모두 이 도자기에서 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하며 그를 도자기의 조상 ‘도조’로 기리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수입한 대포를 만들기 위해 이삼평의 후예들이 제철소를 만들어 그대로 재현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문화생활을 위한 출판, 공연, 향락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업 활동이 현대도시 못지않게 이루어집니다.
상품을 소비해줄 대도시가 있으니 각 지방은 지역의 특산물을 경쟁적으로 개발하고 다이묘들은 에도에 모여서 상품정보를 교환하면서 고급제품의 상업화, 대중화가 이루어집니다. 소비경제의 상업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권력의 주도권이 점차 상인들에게 옮겨가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1800년 중반, 개국할 즈음에는 실질적인 권력을 오사카의 상인들이 장악하게 됩니다.
참근교대제가 일본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방대합니다. 경제적 문화적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와 국민의식의 고양에도 기여를 합니다. 상인과 노동자들이 부를 축적함에 따라 ‘조닌’이라 불리는 도시 서민계급이 등장하고 에도는 전국을 묶어내는 정보 네트워크의 허브가 되었으며, 에도, 교토, 오사카는 각각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동경의 대상이 됩니다. 이로 인해 지방 분권에 따른 극심했던 지역의식은 조금씩 옅어지게 되고 하나의 일본이라는 동일 의식이 싹트게 됩니다.
출처: 메이지유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박훈, 민음사)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본사(신상목, 뿌리와 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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